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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성스러움

박영택 (경기대교수, 미술평론)


 김은진의 화면은 뜨거운 에너지로 들끓는다. 그것은 이미지와 색채의 비등점으로 달아올랐다. 중심도 주변도 없이 화면 가득 강렬한 도상적 이미지가 흩어져있는가 하면 불화나 종교화처럼 좌우대칭으로 구성된 경우도 있다. 날것의 내음을 풍기는 원색들이 그 도상들을 불질러놓아 마냥 환하다. 온통 '발광'發光한다. 익숙해 보이면서도 낯설고 생경한 그림 안에는 다양한 종교적 도상들이 본래의 모습에서 조금씩 변형된 체 풍경으로 펼쳐져있고 그것은 작가의 내면과 의식을 환각적으로 엿보게 하는 장면화가 되고 있다. 이 비현실계는 현실계를 흐트러트리고 교란하고 의식과 이성이 지배하는 실세계의 고리를 끊는다. 그것은 오로지 꿈과 몽상, 환영, 상상력에 의해 유희되는 만화경 같다. 그래서인지 이 채색화는 조금은 낯설고 독하다. 그것은 근대 이후 이 땅에서 전개된, 서구에서 수용된 미술에 관한 개념적 게임의 추종과 연결된 것도 아니고 동양화의 전통을 강박적으로 의식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민화나 종교적 도상의 치졸한, 소박한 각색과도 거리가 멀다. 형상과 색채를 빌어 장식하고 이야기를 가설하고 자신의 상상력을 온전히 시각화 하는 일이 구도처럼 전개되는 그림그리기다. 상상의 원초적 흐름과 함께 하는 그림이기도 하다. 그것들이 온전히 화면을 장악하고 탱탱하게 화면을 찢어 놓는다. 키치적인 이미지연출에 가까워 보이면서도 그것의 가벼움에 비해 좀 비장하고 괴이하다. 보는 이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서사와 연출은 그만큼 낯설고 새로운 이종과 변성으로 '마구' 나아간다. 뇌 속에 들어와 있는 모든 이미지들을 호명하는 작가의 음성은 초혼과도 같고 천지간 신들을 깨우고 불러들이는 종소리 같다.

 시각적인 볼거리가 가득한 이 화면은 전 세계의 종교적, 민속적 도상의 집합소 같은 느낌을 준다. 이른바 기독교적 성화, 불교도상, 무속화와 민화 그리고 라틴아메리카의 카톨릭도상, 인도의 종교적 이콘에 더해 프리다 칼로의 그림 등에서 엿볼 수 있는 환각적 상상력과 기묘한 서사장면 등이 하나로 수놓아져있고 작가의 의식과 상상의 풍경 또한 함께 펼쳐져있다. 모든 것들은 용광로 같은 그림 안에서 죄다 녹는다. 삶의 야생의 에너지가 작가를 통해 그림으로 흘러나온다.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온통 그림에 집중하고 있다.

 이 세상의 모든 도상들은 유한한 생을 지닌 나약한 인간들이 지닌 그 공포와 불안을 이기고자 염원했던 것들로서 서늘하고 측은하고 서럽고 두려우며 더러 황홀하게 매만져져 있는 것들이다. 김은진은 그렇게 ‘쌔고’ 강렬하며 섬찟한 주술적 도상들을 자유롭게 편집, 재배열하고 그 위에 자신의 자유롭고 적극적인 상상력의 힘에 의해 불거진 이야기를 올려놓는다. 다양한 시공간 속에서 기능했던 도상 혹은 주술적 이미지들은 단어나 음표, 음절이 되어 재구성되고 재배치된다. 그것들은 본래의 문맥에서 빠져나와 한 개인의 서사에 주술적 차원으로 다시 변환된 것들, 새롭게 모여 이동 중인 것들이다.

 김은진은 타고난 이야기꾼이고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재능이 돋보인다. 그 이야기는 기존 미술의 관례적 서사에서 이탈해있다. 그것은 근대 미술 이전으로 회귀하여 길러올린 것들이자 그것들과 함께 했었던 이들의 마음을 다시 환생시키고 기억하는 가운데서 색다르고 흥미로운 이야기로 다시 출현한다. 소박한 전통의 복귀도 아니고 유희적인 전통의 패러디도 아니다. 요즘 유행이 되고 있는 전통을 갖고 장난하는 것과도 차이가 난다. 작가는 전통 채색화와 이야기 그림, 종교화 등이 무엇이었는지를 상기시키고 그것이 여전히 오늘날 한 개인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기능하는 지점에 대해 발언한다. 김은진은 이 도상적 전통의 내음이 진하게 풍기는 것들을 가지고 현재 자신의 감정과 상황, 염원, 꿈과 악몽, 기원 등을 보여주는 맥락에서 주무르고 있다. 그것은 여전히 이미지의 물신주의를 실현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이미지를 통한 영생과 치유, 간절하고 뜨거운 바람의 형상화!

 엄청난 서사의 에너지와 깊이, 폭은 이미지와 색채의 풍요로움을 넘어 과잉으로, 낭비로 넘어선다. 절제되지 않은 도상들과 화려한 색채들은 화면 안에서 산맥과 폭포와 바다를 이룬다. 지천에 꽃이 만발하고 그칠 줄 모르고 지속해서 쏟아지는 물줄기와 어디론가 흐르는 엄청난 물/바다를 보여주는 풍경은 자기 내면에 담긴 세상의 장면이다. 특히 흐르고 쏟아지는 물은 유동하는 힘과 에너지, 무한히 반복되는 생의 윤회를 은유한다. 그 풍경 안에 작가가 있고 아들과 가족이 등장한다. 특히 '金家'라는 글자가 쓰여진 커다란 심장이 기념비적으로 직립해있는 그림은 압도적이다. 몸의 기관에서 적출된 심장은 형언하기 어려운 뜨거움, 생명, 한때 쉬지 않고 뛰었으며 누군가를 위해 두근거렸을 그 순간을 상기시켜준다. 문신처럼 박힌 문자는 그 뜨거운 심장으로 간절히 기원하는 가족을 지시한다. 또 다른 그림으로는 송학도 민화병풍을 배경으로 똥머리를 한 아기 보살 같은 이가 세숫대야에 담겨있다. 불교 도상과 천주교, 기독교의 모든 도상들이 마구 섞이고 자의적 변형과 해체, 재결합을 거듭해 이루어진 잡종적 도상연출이다. 벌거벗은 아이의 하반신은 세숫대야에 담겨있고 아이의 작은 성기가 물에 잠긴 체 드러나있다. 양수 속에 담겨있었을 태아의 원초적 보금자리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보호와 치유의 성격도 강하게 드러난다. 근작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 물은 또한 씻어냄, 죄사함, 세례, 정화 그리고 삶과 인생의 난관과 역경 등도 은유한다. 아울러 물을 삶의 시련이나 인생의 경로에 비유한다면 작가는 그 물속에서 바둥대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 그 안에 부부, 아이와 자신도 떠밀려 흐른다. 자신을 풍경 속에서 서늘하게 관조하고 있다.

 캔버스나 종이 위에 아크릴과 채색물감을 사용해 그려나간 이 채색화는 박생광, 천경자로 이어지는 한국 현대 채색화의 물신주의 전통과 연결되어 있다. 채색화 전통을 새삼 환기시키는 동시에 이를 단순한 장식성이나 소재주의로 전락시키지 않고 자신의 서사에 연결, 이야기 그림으로 풀어나가고 있다. 아울러 그것은 세련되거나 정교하다기 보다는 날것으로, 야성으로 번득인다. 한 개인의 감성과 상상력, 감각이 색과 도상으로 자유롭게 펼쳐진다. 강렬하고 생경한 색상의 충돌과 조합은 이미지의 낯설음을 증폭한다. 그것은 익숙하면서도 어딘지 불길하고 그로테스크하면서도 눈을 쉽게 거두지 못하게 한다. 화면은 하나의 화면 내지 3개의 화면이 잇대어져 흡사 종교적 도상이 그려진 삼면화를 연상시킨다. 아울러 그림 안에 커튼이 자주 그려진다. 그것은 그림의 내부를 다시 열어 보이고 하나의 장면을 연극처럼 엿보게 한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의도적으로 보여주기도 하고 은폐시키려는 듯도 하다. 그런가하면 신체를 감싸고 가리우고 보호하는 막의 구실도 한다.

 김은진은 항상 “현대인들에게 있어 진정한 성스러움이란 어디에 존재하며 또한 구원이란 무엇인가” 묻는다. 그래서 그녀의 그림은 타인에 대한 배려의 선물이다. 우선 자신과 가족을 위한 배려이다. 작가에게 있어 가족, 식구, 가계는 중요하고 해서 그들의 안녕과 희구를 빈다. 나아가 타인들에 대한 치유와 선물로서의 도상들을 그린다. 사랑(구원)의 힘을 상실하고 주술과 신비와 영성의 힘을 잃어버리고 망각한 현대인들에게 다시 그 처음의 장으로, 본래 이미지의 힘과 치유적 기능으로 돌아가게 하려는 것이다. 이미지라는 선물을 통해 상실한 영성을 회복하고자 한다. 그러니까 김은진의 그림은 동시대의 기이한 종교적 도상, 지독한 성스러움을 지닌 도상화이자 새로운 민화다. 영성에 관여하고 상심한 마음들을 다독이는 치유적 기능을 가진 그런 그림말이다.

김은진 개인전에 부쳐

김인선 (윌링앤딜링 대표)


 김은진 작가의 작업실을 방문한 몇 시간 동안 나는 그에게서 '죽음‘에 대한 방대한 양의 생각을 듣게 되었다. 작가는 죽음에 대하여 집요하리만치 들여다보고, 상상하고, 떠올리며 자신의 화면을 채워나가고 있었다. 화면에는 살과 피, 내장 등을 연상하게 하는 육(肉)적인 색채와 형상들로 가득한데, 이는 죽음과 삶에 대한 집착 등으로 뒤엉켜 있는 작가의 의식 속 풍경을 묘사한 것임을 짐작케 한다. 작가와 이런 저런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다 보니, 전시 제목 <남은 시간>이 마치 죽음을 앞둔 누군가의 회고적 이야기 같기도 하고 또 한편 삶의 제한된 시간을 즐기고 누리고자 하는 강렬한 선언 같기도 하다는 어딘가 이중적인 느낌이 들었다.

 작가가 경험한 죽음에 대한 이야기 중 하나는 어머니에 대한 것이었다. 워낙 친했던 모녀사이였기 때문에 어머니가 암 선고를 받았을 때 받은 충격이 몹시 컸던 것은 물론이오, 작가는 스스로의 삶을 어떻게 지탱해 나갈 것인지가 막막할 정도로 큰 상실감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곧 살아남은 자의 삶에 대한 혐오와 의문, 그리고 호기심 등으로 이어지는데 이러한 계기로 타인들의 삶을 관찰하는 계기가 되었던 듯하다. 그리하여 현재 살아있는 자들의 삶을 지탱해 나가는 모습, 즉 먹고 자는 아주 원초적인 모습에서부터 개인의 삶을 형성하는 수많은 활동들까지 이 모든 것조차 죽음과 연관한 -죽음을 피하기 위한- 행위로 읽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삶과 죽음을 관찰하는 작가의 태도는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을 무대를 바라보고 있는 제 3자의 시점으로 두게 한다. 작품 <6:40pm>속에 그려진 노인들이 춤추는 공간은 어느 특정 풍경 속처럼 보이다가도 화면 앞쪽으로 그려진 테이프 조각이나 책상 모서리 같은 가장자리의 묘사에 의하여 이것은 작가가 내려다보고 있는, 혹은 배경에 뚫린 구멍을 통하여 들여다보고 있는 작은 무대 공간처럼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하이 어느 호텔 앞에서 특정 시간에 갑자기 벌어지는 춤판을 목격하고 이에 대한 생경한 느낌과 약간의 흥분된 즐거움을 경험한 작가는 그때 보고 있었던 광경을 하나의 무대 속 이야기처럼 다루고 싶어 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에 대한 관심은 관음증처럼 들여다보고 관찰하고 있는 작가 자신의 시선을 반영하고 있다. 생과 사의 경계가 사라지는 순간을 상징하듯 개와 늑대의 시간을 보여주는 푸른빛 배경과 황폐해진 주변 풍경을 등지고 춤에 열중하고 있는 노인들은 유유자적하고 초월적이다.

 작품 <의자>에서 작가는 탑골 공원에 놀러 나온 노인 한분을 섭외하여 모델로 삼았다. 노인은 검은 색 털실로 뜨개질을 하고 있으며 속옷 차림으로 자신의 앙상한 몸과 피부 주름 등이 오랜 세월 동안 켜켜이 새겨진 나이테처럼 그의 생의 시간을 시각화하고 있었고, 혹은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허물어져가는 육체를 드러내고 있는 듯 보인다. 노인이 앉아있는 방의 벽면에는 검은 비닐봉지들이 걸려있는데, 이 검은 비닐봉지는 작가의 작업 속에서 종종 발견할 수 있는 상징적인 오브제이다. 이 작업을 지배하고 있는 색채인 검정색은 작가의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돌아가게 하는데 이 기억이 사실 죽음이라는 개념을 정면에서 맞닥뜨린 최초의 트라우마가 되고 있다.

 시골 할머니 댁으로 놀러갔을 때 작가가 산 속에서 목격한 것은 동네 아저씨들이 개를 잡는 장면이었다. 그들은 멍석에 말아서 죽도록 때린 개를 매달아 통째로 불에 구웠다. 까만 잿 덩이처럼 변한 개의 모습이 딱딱한 검은 바위 같다는 느낌을 받았을 찰라, 그들 중 한명이 그 일부를 도려내었을 때 보인 선홍빛의 속살은 어린 작가의 뇌리에 두고두고 남게 되었던 것이다. 정겨웠던 시골 풍경 속 바위들이 왠지 동물의 시체를 떠올리게 한 이 기묘한 경험의 충격에서 채 벗어나기도 전에 그는 할머니 댁으로 돌아와 손녀인 자신을 위해 준비하고 있던 보신탕의 날 재료를 그대로 마주치게 된다. 그것은 마당에서 놀고 있던 개였으며, 토막 낸 몸의 순서가 뒤바뀐 채 마루 위 바구니에 담겨져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기억은 어머니의 죽음을 기화로 그림 속에서 재생되어 오고 있었다. 그림의 곳곳에 등장하는 신체의 절단된 이미지를 비롯하여 검은 물체들 사이로 벌겋게 드러나는 선홍색 속살은 검은 죽음과 붉은 생명의 이중적인 상징기호처럼 여러 작품 속에서 드러난다.

 인간과 동물, 식물, 산수화를 연상하게 하는 풍경 등을 품은 작품 <냉장고> 화면의 배경은 언뜻 산수화가 펼쳐진 어떤 마을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내장과 배설물로 뒤 덥힌 폐쇄된 공간처럼 보이기도 하다. 이 역시 작가가 의도하고 있는 무대 공간의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고 그 속에는 살육하고, 뒹굴고, 배설하고, 전쟁하고, 잔치를 벌이는 절단된, 헐벗은, 폭력적인, 잔혹한 모양새의 사람들 혹은 절단된 신체들이 등장하고 있다. 작가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와 관련된 원초적인 삶의 모습에 집중하고 있다. 뭔가를 죽이고 자신을 지탱하고 있는 생태계 속에서 작가에게는 조금 특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그는 냉장고 냄새가 역겹다고 얘기했다. 냉장고 속에 뒤얽힌 음식물들은 사람의 몸을 지탱하는 양분들이고 이를 먹고 내 몸을 유지하겠다는 욕망의 창고로서 비추어지자 그에게는 역겨움의 대상이 되었다. 화면의 색은 선홍빛, 붉은빛, 검은 빛 등 육(肉)적인 색상이다. 그것은 살의 색, 내장의 색, 혈액의 색, 머리카락의 색, 배변의 색 등 인간의 몸과 관련한 색을 채워져 있기 때문에 그림 속에서는 인간의 육신과도 같은 냄새가 올라오는 것 같다. 그는 몸을 구성하고 지탱하기 위하여 몸속으로 집어넣고 배출될 다양한 음식들의 냄새를 품고 있는 냉장고 속 냄새가 무척이나 역겹더라는 것이다. 그림 속에 펼쳐진 이야기들은 중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사방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며 떠오르는 이미지들과 그림을 그릴 당시의 사건들, 과거의 기억들 등등을 이어나가고 있다. 시공간의 두서없이 늘어놓은 이미지들을 따라가며 자세히 관찰하다 보면 그가 말하는 ‘역겨움'에 대한 이야기 속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화면을 가득 채운 인간 군상의 섬세하고 세밀한 묘사에는 삶을 지탱하기 위한 징글징글한 노력에 대한 작가의 감탄 역시 내재되어 있으며, 스스로 남은 생을 어떻게 보낼 것이며 다른 이들은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으로 타인의 삶의 모습에 비추어진 자신의 욕망을 그려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비교적 초기에 그려진 작업인 <8:27am>에서는 물속에 반쯤 잠긴 자신이 둥둥 떠다니는 검을 봉지들을 붙잡고 있다. 틀니들이 쏟아져 나와 물속을 떠다니고 있다. 다른 작업들과 마찬가지로 이 작업에서도 상징적 오브제들이 화면에 가득한데 초현실적인 이미지의 도상이지만 이는 철저히 현실적인 작가의 상황과 감정을 반영한 이미지이다. 남편의 출근, 아이의 등교 직후 8시가 지난 이 시간이면 어김없이 반복되는 일상에 갇혀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음식 섭취를 통한 목숨 부지의 욕망을 대변하고 있는 틀니, 반복적으로 생명과 죽음의 이중 메타포를 지시하는 검은 비닐봉지 등은 물이라는 매개적 소재를 통하여 추상적 이미지와 상징성으로 극대화 한다. 작가가 사용하는 또 다른 강렬한 상징체는 머리카락이다. 그의 작업실을 둘러보다 보면 싹뚝 자른 듯한 땋은 머리카락들이 걸려 있는데, 이유를 물으니 사람의 신체 중에서 가장 끈질긴 부분이기 때문에 머리카락에 대해 특별히 생각하는 것 같았다. <지금을 기념하라>, <내려오는 길> 시리즈에서는 이러한 머리채를 소재로 하여 생명력과 흘러가는 시간을 상징하고 있다. 어김없이 펼져진 흙밭과 같은 대지를 구분하는 하늘빛, 그리고 산수화를 닮은 풍경 속에는 유난히 머리채 더미가 눈에 띈다. 작가는 인간의 몸이 죽어서 썩어가는 동안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 징그러우리만치 질긴 생명력으로 이들의 원형이 보존되는 현상에 어의가 없다는 듯 실소한다.

 세월호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장면을 고스란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그 순간은 작가 뿐 아니라 우리 모드에게 큰 상처가 되었고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겼다. 죽음을 극복하고자 생의 모습을 지켜보아 왔던 작가는 이를 추모하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재현하고 달래고자 하는 이미지를 그리지 아니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작가는 작품 <4:16pm>을 통하여 희생된 아이들의 넋을 달리기 위하여 예전의 색감을 되살려 화려한 꽃잎으로 화면을 채운다. 군복을 입은 남자가 젖은 아이를 품에 안고 있다. 죽음을 외면하지 말았어야 할 애통함이 전해진다.

 김은진의 화면은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고 있다. 그가 그림을 통하여 후각, 촉각, 시각, 청각 등을 예민하게 후벼 파는 원초적인 감각을 발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의 기억을 재생하는 이미지들이 뒤얽히면서 수많은 상징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을 향해 현재의 삶에 대하여 묻는다. 그는 죽음의 기억과 죽음의 과정을 그리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종래에는 타인을 포함한 삶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 하고자 한다. 그의 실존적 물음에 대한 물음과 답은 반복적이고 꾸준하다. 문자 그대로 '남은 시간'을 물리적으로 가늠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지금 존재하는 이 순간, 생을 체험하는 동시에 죽음 또한 삶의 형태로서 함께 겪고 있다는 것을 김은진의 작업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김은진의 치유와 초탈을 위한 ‘남녀상열지사’:
신기(神氣)를 담은 물건의 성상화(Icon)

고동연


 김은진의 성상화의 전통

 러시아 정교회의 전통에서 이콘(Icon), 혹은 성상화는 단순히 그림이 아닌 경배의 대상으로 여겨져 왔다. 성상화에서는 관람객과 그림 간의 교감을 극대화시키기 위하여 배경의 세부 묘사가 최대한 배제 되었고 이에 반하여 중앙의 성모, 성자, 혹은 성인의 모습은 멀리서도 쉽게 알아 볼 수 있도록 클로즈업 되었다. 동양화가 김은진의 작품은 성모마리아 상이나 대표적인 순교자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린 모습만을 부각시키는 성상화의 구도를 연상시킨다. <치유>(2003)에서 전체 인삼의 무정형적인 듯이 보이는 형체는 이내 사람의 전신상을 연상시키면서 화면의 중심에 직립형태로 배치되어있다. <불쌍하게 생각하다>(2005)에서도 목이 부러지고 머리가 한쪽으로 기운 인형은 허공에 내던져져 있다. 어떠한 물리적인 배경이나 이야기와도 연관되지 않은 채 인형은 공중에 매달려 있다.

 물론 여기서 김은진의 소재들은 성상화의 주제들과는 명백히 달라 보인다. <불쌍하게 생각하다>에서와 같이 손상되고 더러워진 인형의 모습이나 <개가죽과 지팡이>(2004)에서와 같이 주교의 옷을 입고 있는 얼굴 없는 성직자의 모습은 이콘이 전달하고자 하는 이상적이고 기독교적인 가치관과는 아무 상관없는 듯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작업에는 성상화에 비견할 만한 몇 가지 요소들이 집중적으로 발견된다.

 첫째로 그녀가 재현하고 있는 인삼, 인형, 기이한 여성의 모습, 인간 신체의 부분들은 지속적으로 그녀의 작품들에 등장하면서 작가만의 도상을 이룬다. 그리고 그러한 도상들은 전혀 물리적으로 개연성이 없는 공간에 놓여 지게 됨으로써 궁극적으로 일종의 아이콘과 같이 등장한다.

 둘째로 성상화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특정한 대상을 개념화하고 알아보기 쉬운 간략화 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상화에서 다루어진 대상은 일상생활에서 실제로 보고 느끼는 특수한 대상에 관한 것이 아니라 유형화된 대상에 가깝다. 그러다 보니 성상화에 등장하는 인물의 형태나 묘사는 대상이나 이야기의 가장 극적인 순간이나 특정적인 부분만을 전달하는 축약된 형태로 남게 된다. 예를 들어 성상화에서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예수님의 책형 이미지는 예수님의 고난에 관하여 잘 알려진 내레티브중에서 절정에 다다른 한 순간을 표현한 것이다. 즉 부분이 전체를 상징하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김은진의 <心中常有 마음 가운데 항상 늘 그러한 것이 있다>(2008)에서도 상징적인 의미 이외에도 살아서 꿈틀거리고자 하는 인간 전체의 형상을 연상 시킨다.

 그렇다면 왜 김은진은 자신의 소재들을 성상화에서와 유사한 방식으로 다루고자 하는가? 그는 왜 인삼이나 인형으로부터 인종적으로 혼성되어 보이는 눈이 큰 여인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자주 사
용하는 소재들을 단순히 재현의 대상이 아니라 무엇인가 경배되고 강렬하게 정서적으로 관람자를 자극하는 대상으로 다루고자 하는가? 그리고 이를 위하여 전체가 부분을, 그리고 부분이 전체를 상징하게 되는 실로 비논리적인 성상화의 미학적 수법을 사용하고 있는 작가의 의도는 무엇인가?



성상화의 혼돈된 세상: 전체/부분, 안/밖이 바뀌다

 성상화에서 전체와 부분을 혼동시키는 미학적 수법은 결국 그것이 지닌 특정한 목적을 충족시키 기 위함이다. 성상화는 특정한 사건이나 대상을 ‘있었던 그대로’ 혹은 ‘그대로’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는 않는다. 대신 성상화는 무엇보다도 보는 이의 감수성을 자극하기 위하여 그려지고 보존된다. 그러므로 성상화는 지나치게 사실주의적이거나 개연성을 갖출 필요가 없다. 대신 작품은 그것을 바라본 관객들로 하여금 강렬한 정서적 반응, 즉 신의 존재를 경험할 수 있 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실제로 러시아에서 신도들은 집의 한 구석에 성상화를 설치해 놓고 매일 경배를 드린다. 우리나라의 부적처럼 성상화는 초월적인 기운을 내포하고 있는 ‘물건’이 된다. 김 은진의 작품에서도 특정한 물건들이 다루어지고 재배열되는 방식은 결코 논리적이지도 서술적이 지도 않다. <주름의 마리아>(2007)에 등장하는 인형의 모습은 독립적인 이미지인 동시에 거대한 치마의 한 부분을 이룬다. 또한 그녀의 하체는 다시금 전체 옷자락의 부분이 된다. 독립적인 개체 였던 이미지는 짙은 붉은 치마 주름에 파 묻히면서 부분을 이루게 된다. 유사한 아이콘들은 특정 한 시, 공간을 암시하는 배경과는 무관하게 반복적으로 등장하면서 서로 다른 그림들에서 전체가 되기도 하고 부분이 되기도 한다. 또한 <달콤한 배>(2006)나 , <제단>(2009)에 등장하는 산수풍 경은 <남녀상열지사>에서 각각의 돌산이나 수석으로 축약되고 진열장에 배열되어 있다. <남녀상 열지사>나 <안녕하세요?>(2009-2011)에서 골동품상을 연상 시키는 진열장 위에는 산들의 작은 모형들이 선반위에 놓여 있으며 이외에도 작가가 자주 사용하는 각종 아이콘들이 차례로 배열되 어 있다. 게다가 징그럽게 생긴 심장은 일종의 ‘장기’와 같이 선반 위의 한 자락을 차지한다. 다시 말해서 아이콘의 예수님의 상이 더 이상 기독교의 특정한 교리를 설명해 내는 수단이 아니라 신 의 영기를 받은 일종의 물건이 되듯이 김은진의 그림에 등장하는 각각의 도상들도 그 맥락으로부 터 이탈하여 영기를 지닌 매개체가 되고 있는 것이다.

 김은진의 작업에 등장하는 심장의 이미지는 이러한 측면에서 가장 인상적이다. 심장은 그야말로 인체의 한 부분이다. 하지만 동시에 심장은 인체로부터 튀어나와서 또 다른 몸의 상체를 구성하 게 된다. 여기서 시각적으로 그리고 상징적으로 인체의 안과 밖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뿐만 아니 라 관객은 인간의 생명력을 추상적으로 인식하던 방식으로부터 벗어나서 우리가 숨을 쉴 수 있도 록 도와주는 장기와 대면하게 된다. 게다가 작가는 강렬하고 반짝이는 색감을 사용함으로써 관객 의 시선을 잡아 둔다. 그저 그렇게 지나가던 인체가 아니라 아예 해부되어서 내부가 외부로 드러 내 보여진 신체와 장기의 상태는 성상화의 유사한 정서적 반응을 불러일으킨다고 할 수 있다. 관 객들은 더 이상 간접적인 이미지나 메시지를 떠올릴 수 없으며 마지막 심장 박동을 듣는 듯한 착 각을 갖게 된다. 게다가 산의 모형들과 함께 선반대 위에 놓여진 심장들은 작가가 자유자재로 자
연과 인간의 생명력을 ‘물건’으로 해체, 재현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김은진은 왜 안의 것을 밖으로 끄집어 내었을까?: 집을 뛰쳐 나오다

 대상을 맥락으로부터 이탈시키고 부분과 전체를 혼돈함으로써 소재를 특정한 내레티브와 상징적 의미로부터도 분리시키고 특정한 ‘기’ 혹은 ‘힘’을 부여 받도록 한 작가의 의도는 무엇인가? 심장 을 거대하게 그리고 그 뭉클뭉클한 표면을 과장한 김은진의 그림은 과연 어떠한 충격효과를 노리 고 있는가? 물론 이에 대한 적당한 대답을 찾기란 쉽지 않다. 작가의 관심사는 종교로부터 사회 통념, 여성문제에 이르기 까지 복합적이기 때문이다. 동일한 소재들은 여러 차례 다른 작업에서 반복되기도 하고 서로 결합하기도 하면서 작가의 비논리적이고 초현실적인 세계가 여러 방면으로 펼쳐지고 있음을 증명해 보인다.

 하지만 안과 밖의 구분은 여성으로서 매주 교회에 다니면서 스스로 특정한 사회적, 종교적 정체 성 내부에 틀어 막고 있는 작가의 현실을 연상시킨다. 물론 여기서 김은진의 그림이 그녀의 개인 적인 삶을 표방하고 있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 그러나 각각의 물건들은 분명히 안과 밖의 이분 법 속에서 힘들어 할 수 밖에 없는 작가의 존재성에 대해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특히 튀 어나온 심장은 신체의 내부와 외부, 골동품 집에 놓인 ‘산’의 모형은 풍경화의 외부와 골동품의 상의 내부, 그리고 나아가서 여성적인 내외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려는 작가의 의도를 반영한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김은진의 2003년과 2005년에 등장하였던 손상되고 더렵혀진 인형의 모습이나 무섭고 권위적으로 보이는 주교의 이미지보다 더 양가적인 의미들을 지니고 있다. 한편으로는 이 제 막 짙은 색의 커튼이 드리워진 내부로부터 나와서 여신과 함께 산수풍경을 즐기는 이국적인 얼굴의 여인(혹은 자화상?)은 마침내 집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즐기는 듯하다. 그녀는 무릉도 원을 향해 떠나고 있는 듯 보이며 그녀의 얼굴이 조금 젊어 보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녀의 어색한 표정과 커튼으로 드리워진 공간은 결국 그녀에게 주어진 자유가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또한 아름다운 산수풍경에 등장하였던 산, 생명력을 상징하는 심장은 어두운 실내선반에 일종의 물건, 혹은 상품같이 진열되어 있다.

 저항과 초월을 위한 ‘남녀상열지사’

 “보수적인 남성 위주의 한국사회의 한 여자로서 엄마로서, 종교인으로서 동시에 현대미술을 하는 작가로서 삶을 조화롭게 만들어 간다는 것은 나에게 매우 혼란스럽고 무거운 삶의 무게를 지게 된다. 왜냐하면 한 개인으로서 내 자신을 들여다 볼 때 내 자신은 그런 사회에서 요구하는 이상 적인 삶의 모델과는 거리가 먼 이기적이고 두려움 많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가 요구 하는 삶과 내가 느끼는 내 자신의 모습과는 넓은 간극을 극복하려는 노력들이 나의 작업의 주요 모티브가 된다. 성상 등의 종교적 아이콘들과 그것과는 대치되는 나의 유약하고 고단한, 완벽함과 거리가 먼 나의 삶의 현상들을 화면에 대립시키거나 마구 섞어서 재현시킴으로써 이 양쪽 삶의 괴리감이 주는 고통을 객관화 하려한다. 이러한 나의 예술적 노력은 나의 구도의 한 방법이자 작
업의 주제이다.” (김은진. “작가노트,”, 2010-2011)

 작가는 자신이 수동적이라고 말한다. 체제에 안주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박차고 나오지도 못하 는 일상생활을 반복한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면에서 이국적으로 생겼지만 매우 어색한, 그리고 수 동적이며 답답한 실내를 배회하는 무표정한 여성의 모습은 작가의 자화상을 연상시킨다. 한시적 으로만 자유를 즐기는 이국적인 여성처럼, 언젠가는 여성성이라는 몸의 한계를 벗어 던지고 싶어 하는 양성적인 불상처럼, 수술대에 놓여서 마지막 숨 고르기를 희망하는 숨기고 있는 인물상처럼 그녀의 그림에는 폭풍전야를 경험하면서도 그것을 억누르려는 힘이 공존한다. 그녀의 작업들에 존재하는 확연한 안과 밖의 구분은 이러한 해석을 부추긴다. 게다가<안녕하세요?>에서 새해 첫 인사를 드리는 그녀의 모습은 한편으로는 위압적이지만 고개를 숙이고 최대한 자신의 표정을 감 추는 그녀의 모습은 다른 한편 애처롭다. 남녀상열지사 시리즈 중 <사다리도>위에서 수영복을 입 고 다양한 정체성을 취하면서 날개 짓을 해보려는 당당한 ‘그녀’의 모습은 귀여우면서 어색하다.

 모순되고 갑갑한 현실에 대한 작가의 개인적인 인식은 결국 현대 예술가들 모두에게 공통적인 것 이다. 프로이트가 1910년 글 레오다르드 다 빈치: 그의 성장기의 기억에서 르네상스 대가의 그림 에 등장하는 이미지를 불새로(잘못) 해석하면서 예술은 분노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승화시키면서 등장한 정서적, 미학적 해결방법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생각은 오랫동안, 그리 고 현재에도 예술가와 예술의 사회적인 역할을 바라보는 데 있어 중요한 관점을 이루었다. (물론 이러한 관점은 예술의 사회적 효용성을 보다 개인적인 측면에서 정당화 하기 위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만약 종교와 예술의 공통점이 있다면, 종교 또한 예술과 마찬가지로 부조리한 인간의 존 재와 그림을 둘러싼 이 세상의 고통을 보다 긍정적인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초월해보기 위한 염 원을 담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목욕 충만도>(2007)에서 붉은 커튼이 드리워진 갑갑한 실내에 서 초탈의 포즈를 취하고 있는 김은진의 모습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세속적인 욕망으로부 터의 탈피가 불가능하다면 초탈을 믿는 종교인처럼, 그저 묵묵히 부처와 같이 스스로를 구원하는 생산적인(?) 대안을 결심한 부인처럼 불상의 이미지는 실존적인 고통과 예술의 역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초탈이나 초극의 길을 걷고자 하는 듯이 보인다. 혹은 <남녀상열지사>에서 함께 어울 려 춤을 추고 있는 군중의 모습과 대포로부터 쏘아 올려진 어린아이의 모습은 일상사의 고통을 ‘춤판’으로 승화시키려는 작가의 의도를 엿보게 된다.

 하지만 과연 그녀의 양성적인 몸이 능동적이고 자유로운 자아로 이어질지, 초탈하고자 하는 종교 인의 염원이 과연 이 생에서 실현될 수 있을지, 예술이 과연 삶의 고통을 이겨내는 데에 구체적 으로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일 수 밖에 없다. 초극이나 초탈이 효과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면 놀라운 신기를 지닌 성상화들도 우리의 불안을 떨쳐주고 고통을 치유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실험적이고 비평적인 의도를 지녔던 많은 현대예술가들이 공통적으 로 겪어온 시행착오라면 예술가에게 주어진 가장 현실적인 해결방법은 결굴 저항을 계속해 가는 것뿐일 것이다.